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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 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쿠데타)이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中國)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정변배경
쇄국정책에 대한 반작용
대원군 시절부터 북학파 박규수와 유대치, 오경석 등은 우리도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이들은 개화파를 형성했다. 日本(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가 되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drop) 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인인





레포트/인문사회

다.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나, 일설에는 80개 조항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따 그러나 12월 4일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군 위안 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전하는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한다,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한다,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순사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따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日本(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현재 전한다.
12월 4일 저녁의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내외와 왕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중국(中國)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청년지식층에 의한 계몽성 개혁이라는 평가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점과 준비 미숙으로 실패했다는 비판이 상존하고 있따 그해 12월 말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갑신정변 과정에서 日本(일본)측의 개입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등으로 부른다.
1884년 12월 7일 오후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치밀하지 못한 준비로 3일만에 진압되었다.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日本(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처음 하였다. 그밖에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개요
1874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1876년 日本(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진압 후, 갑신난,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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